4부_ 대중에게 선보이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합스부르크의 수집품을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
18세기 카를 6세 황제의 시대, 내정을 불안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있었다. 카를 6세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이다. 카를 6세는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1740년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랜 기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서야 그 지위를 인정받는다. 힘들게 왕의 자리에 오른 만큼 마리아 테레지아는 근대화를 추진하며 대내적으로 근검절약하는 검소한 왕이 되고자 하였다. 그녀가 머물던 쇤브룬 궁전도 수수한 양식으로 개조하고 진흙에서 추출한 노란색 안료로 벽을 칠해 '마리아 테레지아 옐로'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을 벨베데레 궁전으로 옮겨 전시하고자 했고 아들 요제프 2세 때 벨베데레 궁전을 대중에게 무료로 개방하며 그 뜻을 이루게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존경을 표하는 행렬 (구스타프 아돌프 뮐러 1864-1937) 1740년 동판화
1740년 10월 20일 카를 6세(1685-1740) 황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왕이 된다. 1740년 11월 20일 새로운 왕에게 존경과 충성을 표시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빈 시내 호프부르크 궁에서 성 슈테판 대성당까지 이어졌다. 고위직 관료들이 앞장서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마차가 뒤따른다. 빈 마차는 서거한 카를 6세에 대한 추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카를 6세가 사망한 뒤 1740년 오스트리아 왕의 자리에 올랐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될 수 없었다. 결국 1745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프란츠 1세는 정치에 큰 뜻이 없어 사실상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국정을 운영하며 실권을 가졌다. 1765년 갑작스러운 프란츠 1세의 사망으로 아들 요제프 2세가 황제의 지위를 계승한다. 이로써 마리아 테레지아 왕과 요제프 2세 황제의 독특한 공동 통치가 시작된다. 어머니와 아들은 모두 오스트리아에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추구하는 방식이 달라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급진적이었던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은 결국 주변의 반대에 부딪혀 결실을 보지 못한다.
빈 고전파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의 교향곡 48번 2악장은 하이든이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 작곡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궁정의 분위기를 느끼기 좋은 곡이다.
요제프 2세 (요제프 히켈 1736-1805) 1785년경 캔버스에 유화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아들인 요제프 2세(1741-1790)는 아버지의 황위를 물려받아 176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다. 서재를 배경으로 한 모습은 요제프 2세가 '일하는 황제'로 묘사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지도와 지구본은 신지식을 섭렵한 군주의 지적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전통적으로 그려지던 황실 휘장이 없어 그가 허례허식 없는 황제로서 오스트리아 국민 앞에 서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검은 옷을 입은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는 빈으로 유학 온 프랑스 로트링겐 가문의 9살 연상 프란츠 슈테판과 사랑에 빠졌다. 카를 6세는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했고, 1736년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금슬이 좋아 슬하에 16명의 자녀를 두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1765년, 아들 레오폴트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프란츠 슈테판은 갑작스럽게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프란츠 슈테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죽을 때까지 검은 옷을 입어 사랑했던 남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평화의 여신상 (안톤 폰 마론 1733-1808) 1772년 캔버스에 유화 스케치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의 대형 초상화를 위해 그린 스케치다. 1765년 남편 프란츠 1세(1708-1765)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검은색 상복 차림으로 지냈을 정도로 남편을 사랑했다. 화려한 장식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관람자를 응시하는 모습은 이전에 그려진 강하고 아름다운 군주의 초상과는 다르다. 뒤편에 날개 달린 아기천사와 함께 있는 평화의 여신 에이레네 조각상이 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의 약혼 축하연 (요한 카를 아우어바흐 1723-1786년경) 1773년 캔버스에 유화
1776년 4월 2일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열린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 대공(1742-1789)과 작센 공작 알베르트(1738-1822)의 약혼을 축하하는 공식 연회를 그린 것이다. 테이블 중앙에는 요제프 2세 황제와 황후가 자리하고 있고, 황제의 오른쪽에 신랑 신부가 있다. 테레지아의 두 남자 대공과 후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안토니오를 포함한 다섯 여자 대공이 왕위 계승 순서대로 앉아 있다.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1755-1842) 1778년 캔버스에 유화
마리 앙투아네트로 잘 알려진 마리아 안토니아(1755-1790)는 1774년 프랑스 왕위 계승자 루이 16세와 결혼한다. 프랑스 대혁명 전부터 프랑스 국민들은 '정치에 간섭하는 오스트리아 여자'라 부르며 낭비가 심한 어린 왕비를 싫어했다고 한다. 왕비는 실크로 만들어진 전통적인 프랑스식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일생을 악평에 시달렸지만 한편으로는 일찍이 패션의 선구자였던 인물로 재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셔벗용 식탁 장식. 1736-40년 조가비, 달팽이 껍데기, 금
카를 6세 황제의 황후가 소유했던 것으로 손잡이 기둥에 달린 여섯 개의 고리에는 조가비 장신구로 장식된 셔벗 그릿이 달려 있다. 고리 끝의 장식에는 여성 초상 4점과 남성 초상 2점이 옆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황제 부부와 테레지아를 포함한 세 딸, 그리고 사위 프란츠 슈테판의 초상화이다. 셔벗 그릇 위에 달린 초상 부조 장식은 초상 인물이 셔벗을 먹을 때 사용했음을 시사한다. 셔벗 그릇은 입술을 금태로 둘렀고 바닥은 잎과 띠무늬 그리고 흉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있는 함. 18세기 중반 달팽이 껍데기, 금
갈고동 껍데기로 만든 함으로, 껍데기를 타원형 뚜껑을 만들어 열고 닫을 수 있게 경첨과 금장 색을 붙였다. 뚜껑에는 프란츠 1세(1708-1765)와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의 부부 초상을 새겼다. 가슴 갑옷과 망토를 입은 황제는 황금 양모 기사단 목걸이와 월계관을 썼고 황후는 작은 왕관을 썼다. 조개껍데기와 달팽이를 소재로 한 공예품은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 큰 인기를 끌었다.
아폴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있는 술잔 (요한 안드레아스 텔로트 1655-1734) 1679-83년 은, 부분 은도금, 루비, 에메랄드, 토파즈, 다이아몬드
잔에는 아폴로와 다프네 이야기가 장식되어 있다. 잔 몸통에 장식된 세 개의 원형 창에는 다프네에게 구애하는 아폴로, 다프네를 따라가는 아폴로, 그리고 월계수로 변신하는 다프네가 묘사되어 있다. 뚜껑에는 아폴로가 짝사랑하기 전에 일어난 세 가지 사건, 즉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한 피톤을 격파하는 아폴로, 큐피드를 놀리는 아폴로, 아폴로에게 황금 화살을 쏘는 큐피드가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시대의 앙숙, 프란츠 2세와 나폴레옹
1792년 프란츠 2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했을 때, 유럽 전역은 프랑스 대혁명(1789)의 영향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이후 숙적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프란츠 2세의 치세는 전쟁으로 얼룩진 시대가 되었다.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 전쟁은 무려 7차까지 이어졌고, 오스트리아는 연이은 패배로 많은 영토를 프랑스에 빼앗겼다. 더구나 프란츠 2세는 딸마저 나폴레옹 1세와 결혼하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나폴레옹이 1804년 스스로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고 라인 지방 국가들을 통합하여 라인 동맹을 결성하자, 프란츠 2세는 위기감을 느끼고 오스트리아 영방을 결집해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한 후 프란츠 1세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후 1806년 스스로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다.
성 안드레아 (카밀로 루스코니 1658-1728) 1705~10년경 청동
성 안드레아는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 명이다. 그는 X자 모양의 십자가에서 처형되어 X자 십자가를 성 안드레아의 십자가라고도 부른다. 18세기 초 교황 클레멘스 11세(1649-1721)는 로마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의 중앙통로 벽감에 안치하기 위해 대형 사도 조각상 12점을 주문한다. 이 작품은 실제 대리석 조각으로 작업하기 전 제작한 축소판 모형 중 하나이다.
프란츠 2세_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1세 (요한 조파니 1733-1810) 1775년 캔버스에 유화
프란츠 대공(1769-1835)은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이자 오스트리아 제국의 초대 황제 프란츠 1세가 된다. 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가 주문해서 그린 초상화이다. 대공은 오스트리아식 군복을 입고 황금 양모 기사단 휘장을 걸고 있다. 책이 쌓인 탁자에 손을 올린 자세는 그가 후계자로서 계몽교육의 일환으로 체계적인 역사와 지리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하며 대공 뒤 의자에 놓인 삼각모와 흉갑은 기사도적 용기와 고결함을 상징한다.
라파엘로의 시스티나 성당 테피스트리 연작
레오 10세 교황은 1515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가 라파엘로에게 성경의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삶과 기적의 장면을 담은 10점의 그림을 그려달라고 의뢰했다. 라파엘로가 디자인한 그림을 밑바탕으로 브뤼셀의 직조공 피터르 판 앨스트가 태피스트리를 만들었다. 완성된 태피스트리는 높이가 5미터였고 모두 합친 총길이가 42미터일 정도로 장대했다. 그중 7점은 시스티나 예배당에 설치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술품 중 하나로 주목받았다. 교황은 판 앨스트를 바티칸 궁전의 태피스트리 직조공으로 임명하여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기적의 물고기 잡이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 1483-1520, 제작: 야콥 괴벨스 1세?-1605 이전) 1600년경 양모, 실크
이 작품은 예수가 갈릴리 해변에서 어부 시몬 안드레를 도와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준 기적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고, 안드레는 팔을 저으며 풍성한 수확량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기적을 체험한 후 어부들은 예수의 첫 제자가 된다. 이 기적은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의 베드로를 나타내기도 한다.
아테네에서 설교하는 사도 바울 (디자인: 라파엘로 산치오 1483-1520, 제작: 야콥 괴벨스 1세?-1605 이전) 1600년경 양모, 실크
이 작품은 사도 바울이 선교를 위해 아테네에 머물렀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바울은 아테네 사법 평의회 중 광장에서 양팔을 들고 설교를 하고 있다. 설교에는 불멸에 대한 논의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1513년 영혼불멸에 관한 칙령을 내린 교황 레오 10세와 연관이 있다. 이 작품은 판 앨스트가 바티칸 궁을 위해 만든 태피스트리의 여러 복제품 중 하나로 프란츠 2세가 1804년 나폴리 왕비로부터 매입하여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품이 됐다.
나폴레옹 1세 (안드레아 아피아니 1754-1817) 1805년 이후 캔버스 유화
나폴레옹은 녹색 테두리의 오렌지색 현장을 두르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목에 걸고 있다. 나폴레옹은 1797년 북부 이탈리아 치살피나 공화국의 지방 총독이었고, 1805년 자신을 이탈리아 국왕으로 승급시켰다. 이 작품은 1805년 5월 26일 밀라노 두오모 대성당에서 열린 대판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드레아 아피아니는 신고전주의 화가로 1805년 나폴레옹의 제1 궁정 화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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